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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동학농민혁명정신 찾기 더욱 매진”:함평방송

“함평동학농민혁명정신 찾기 더욱 매진”

장원석_사천마을 동학농민혁명 탑을 세운 전 광주향교 전교

최창호 대표기자 | 입력 : 2024/03/04 [09:53]

 

▲ 장원석_사천마을 동학농민혁명 탑을 세운 전 광주향교 전교    

 

함평에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기록이 주도적이지 못하다.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 전후로 인근 지자체에서 책자로 묶어낸 자료에 나오는 함평과 관련된 내용이거나 동학농민혁명 연구 학자들에 의해 기술 되어진 함평이 나오는 내용이 전부다. 그러다 보니 함평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기록은 세세하지 못하다. 틀리거나 빠진 내용도 있다. 여기에 더 안타까운 것은 세월이 흐르다 보니 구술해줄 만한 후손들이 고인이 되셨거나 함평을 뜬지 오래다.

 

늦었지만 함평의 동학농민혁명을 기록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2023127일 뜻있는 함평군민들이 함평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세미나를 하기위해 신광면 농협 사무실에 모였다. 이날 세미나가 끝나고 함평동학혁명기념사업회 설립을 위한 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 자리에서 추진위원장으로 장영식 신광면 자치위원장이 만장일치로 선출되었고, 총무로는 양계농장을 경영하는 장금일 씨가 임명되었다.

 

2024111일에는 신광면사무소 2층 회의실에서 2차 모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이 함평을 평정한 416일에 함평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정식 출범시키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리하기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앞으로 416일 함평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발족되면 함평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주요인물과 유적지를 발굴하고 이를 정리, 정비하자는 다짐도 하였다.

지금 밝혀진 함평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주요 인물은 손불 죽장 출신의 이화진 접주, 사천마을의 장경삼, 장옥삼, 장공삼, 장씨 삼형제, 관군이면서 동학농민군편에서 서서 싸운 이태형 장군 정도이다. 드러나 있는 인물 외에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다수의 중요인물이 더 있으리라 추정한다.

 

함평에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주요 유적지, 혹은 관련 장소로 파악된 곳은 동학혁명의 이념과 실천강령을 추진하기 위한 공간으로 이용되었던 함평 집강소가 있다. 이 집강소는 인동장씨 경모재로 지금도 건물 빼대는 건재하다. 양림마을 앞 사거리에서 주포 가는 길로 접어들어 얼마 안 가 오른쪽 편에 위치한다.

 

 

많은 희생자를 낳았던 고막포 전투의 무대였던 고막천도 대표적인 함평의 동학혁명과 관련이 있는 유적지다. 이곳 고막포는 예전에 무안지역이었으나 지금은 행정구역상 함평군에 속한다. 2021526일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여 고막포 전투가 재현되기도 하였다. 무안군과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일찌감치 동학혁명과 관련 많은 자료조사와 강연회, 책자 발행을 진행한 결과 이런 행사도 기획하여 할 수 있었다고 본다. 고막포 전투는 함평, 무안 농민군 5~6만명이 나주목을 점령하기 위해 18941118일 나주 수성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앞으로 우리 함평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주도적으로 행사를 해내고, 동학혁명 유적지로 관리해야 할 곳 중 한 곳이다.

 

동학농민군이 훈련을 받았던 신광 괴치 앞의 들도 함평동학농민혁명군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이화진 접주의 고모부였던 장씨 삼형제중 장옥삼 어르신을 통해 장경삼, 장공삼이 거사를 하기로 다짐하고, 모여든 농민들을 이곳에서 훈련 시켰다. 장씨 삼형제가 관련이 깊다 하여 후세 사람들에 의해 삼장들로 불린다.

 

전봉준 장군의 아들들은 모두 요절했다. 유일하게 전용현이 살아남아 후세를 이었다. 함평에는 전봉준의 아들 전용현의 묘지가 있다. 모두 다 역적의 아들로 내칠 때 함평천지에서 전봉준의 아들을 받아 준 셈이다. 결혼도 함평이씨 이양림과 하였다. 전봉준의 아들과 며느리는 함평 곤봉에 잠들어 있다. 전봉준의 손자인 전익선도 함평 곤봉에 모셔져 있다. 전봉준 후손의 묘지도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함평동학농민혁명 유적지에 해당한다.

 

▲ 함평동학혁명기념탑과 사천마을 장씨 삼형제 공적비    

 

 

현대에 와서 세워진 함평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사천마을 장씨 삼형제 공적비이자 함평에서 유일한 동학혁명기념탑도 함평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으로 손색이 없다. 더군다나 이 탑은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세웠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 세월이 흘러 후대로 갈수록 그 빛이 발하리라 본다.

헤아려보면 사천마을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이자 장씨 삼형제 공적비는 함평동학혁명기념사업회를 시작하게 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다음 아래의 이야기는 함평동학혁명의 시작을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사천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정리하고 장원석 전교와 나눈 전화 인터뷰도 옮겨 적는다.

 

때는 2023년 어느 봄날로 기억한다. 함평군국악협회 박행님 단장이 함평방송을 찾아와 내게 말했다.

 

 

내가 살고 있는 사천마을은 동학혁명과 관련이 깊은 장씨 삼형제가 살았던 동네라 이들을 추모하는 기념탑이 있어요.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과 후손들이 동학혁명과 관련하여 뭔가 뜻깊은 행사를 하고 싶어 해요. 좀 도와주세요

 

 

나는 며칠 후 사천마을 회관을 찾아가 동네 분들을 뵈었다. 이날 장씨 삼형제의 후손인 장영식 신광 자치위원장도 뵈었다.

 

 

함평 5.18을 왜곡한 부분을 바로 잡으면 그렇잖아도 함평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모임을 만들려고 했는데 어떻게 제 생각을 읽으셨어요? 하지만 지금 바로 행사부터 진행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선 저부터가 함평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공부가 부족하고, 많은 함평사람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하니 우선 그 일부터 하되 가을 지나서 준비해 봅시다.”

 

이렇게 나는 약조하고 2023127일 신광면에서 함평동학혁명기념사업회 출범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2차 모임 때는 광주 향교 전교를 지낸 장원석 전교께서 광주에서 일부러 오셨다. 그리고 모임이 끝나고 당신이 주도하여 세운 함평 유일의 동학혁명 기념탑이자 장씨 삼형제 공적비가 세워진 사천마을을 함께 방문하였다.

 

이 기념탑을 세울 때만 해도 여기 도로가 이리 높지 않았어요. 전남도에서 도로를 높게 놓으면서 이 기념탑 놓은 장소가 푹 꺼져 버리게 되었지요

 

사천마을에 사시는 장영식 신광자치위원장이 말문을 열었다.

 

축산과학원자원개발부가 들어서면서 진입하는 이 길이 넓혀진다고 하니 이 비석과 기념탑을 옮기는 장소만 확보되면 옮겨달라고 전남도나 군에 건의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내가 장영식 자치위원장 말씀에 말을 보태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영식위원장이 장원석 전교에게 말하였다.

 

당숙, 동네 앞에 당숙 논에다 옮겨서 제대로 정리하게 저 논 기부채납 해 주세요

 

장영식 위원장의 말에 장원석 전교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래라하고 대답하셨다. 동행한 함평동학혁명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 장금일 총무도 저도 비석이고, 기념탑을 옮기게 되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게 돈 천만원 내놓을랍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나는 장원석 전교가 왜 이곳에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고 장씨 삼형제 공적을 기리는 탑을 세우게 되었는지 얘기를 더 듣고 싶었다. ‘함평의 동학혁명은 당시의 기록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 이를 보존하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의 기록도 중요하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원석 전교를 오래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날도 춥고 연세도 있으신데다가 오고 가는 거리도 있어서 전화로 이야기를 듣는 게 전교님께는 편하실 것 같아서였다. 그날 나는 장원석 전교님과 헤어지면서 전화 인터뷰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며칠 후 나는 장원석 전교님께 전화를 드렸다.

 

Q_장원석 전교님, 안녕하세요? 고향이 사천마을이시죠? 고향 마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어요?

A_네, 제 고향은 사천마을입니다. 우리 13대조께서 임진왜란 직전에 사천마을에 들어오셨습니다. 아내인 청송 심씨 할머니 친정이 복치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천마을에 정착하신 것 같습니다. 사천마을은 동네 호수가 제일 많았던 때가 55가구 정도였고, 지금은 30여 가구 정도 될 겁니다. 그리 큰 동네는 아니지요. 그래도 우리 사천마을에 인물이 많이 났어요. 예전에 신광을 사천장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천장이라 해야 얼른 알아듣는다고 그리 불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연유는 동학농민혁명 때 적극 가담하신 장씨 삼형제 중에 장옥삼 어르신이 경제활동을 활발하게 하셨다고 그래요. 사천마을이 신광 소재지하고 2km가 떨어져 있잖아요? 그래도 신광장을 사천장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장옥삼 할아버지가 사천마을 사람으로 발이 넓은 인물이었다고 봐야지요.

 

Q_1996년 장씨 삼형제 공적비(동학혁명 기념탑)를 세우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셨습니다. 당시 공적비를 세우게 된 계기라 할까요? 상황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A_1994년도에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100주년 되던 때, 동학혁명 관련자들을 명예회복을 시킨다고 합디다. 그래서 제가 동학혁명 관련 후손으로 발을 들여놨지요. 서울 쪽에서는 이이화 교수, 광주에서는 전남대학교 이상식 교수가 활동하셨어요. 이이화 교수는 대구분인데 광주고등학교를 나왔어요. 이상식 교수와 동창, 친구예요. 이상식 교수가 동학농민혁명 관련 일을 한다고 하니까 이이화 교수도 동참했지요. 나중에는 이이화 교수가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일을 하다 보니 더 유명해졌습니다.

 

장성에 가면 황룡강이 있지요? 이곳에 황룡강전투를 기념하는 기념탑을 세웠는데 이 전투는 장흥에 이방언 장군이 대나무로 장태를 만들어 가지고 그 안에다 볏짚을 한나 넣어 굴루고 가요. 요놈을 굴러 가지고 관군 가까이 가면 화살을 쏴도 이 장태때문에 사람이 안 상하지요. 이렇게 싸워서 동학군이 이겨 가지고 전주까지 올라갔지요.

 

교수분들이 이런 역사적인 장소인 황룡강에다 전승탑을 세워야 한다. 그랬지요. 그런데 당시 관군 장군 이학승이 이 전투에서 돌아가셨다고 비석이 세워져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 집안에서 이일이 뭔 일이냐?” 하고 반대를 해요. 그래도 역사적인 흐름을 누가 막것어요. 결국 황룡강 전투탑을 멋지게 세웠어요. 그리고 나서 제가 이 탑을 보니까 문득 ! 나도 함평 사천 앞에다 탑을 세워야 쓰것다하는 마음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나상옥 석재조각 도안을 하시는 분께 얘기를 드릴려고 하는데. 이상식 교수가 거기 함평 사천에 세울 탑은 개인이 돈 들여서 젊은 사람이 할라고 하니까 돈 많이 받을라 허지 말고 한 30만원만 받고 해줘라하시드만요. 제대로 도안을 해서 받으려면 그 때 돈으로 몇 백만원 들거예요. 도안을 그려서 가지고 왔는데 일을 할려고 보니 옆에 뭣이 짤랑짤랑 많이 붙어 있어요. 안 되게 생겼어. 그래서 내가 도안에서 불필요한 것은 다 빼고 간단허게 세우자고 했어요. 그 때 돈으로 3천만원 넘게 제가 희사를 했고, 마을 분들, 문중분들도 돈을 내셨습니다.

 

Q_완공하고 제막식이라고 하지요? 제막식도 하셨나요?

A_그럼요. 제막식 할 때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제는 함평향교 전교를 지냈던 분들이 맡아 하셨어요. 양림에 장연수 씨, 신광에 모상춘 씨 두 어른이 집사를 했습니다. 술도 많이 내놓았는데 이 제막식 전에 나는 소를 한 마리 잡아야 쓰것다생각하고 소를 잡을려고 했는데 이게 번거로울 것 같습디다. 그래서 함평축협에 소 한 마리 양의 고기를 주문했습니다.

 

소고기가 도착한 거 본 게 부산물은 빼고 살코기만 갖고 왔어요. 그러다본게 고기 양이 엄청났지요. 동네 아주머니들, 우리 일가 형수님들, 질부들이 나서서 칼질해 가지고 썰어서 손님들 상에 내놓았습니다. 양념장은 우리 집사람이 전부 해가지고 큰 그릇에 몽땅 담어서 광주서 갖고 내려갔지요. 오신 분들이 양념장에 생고기 찍어서 먹으면서 다 좋다고 말허고 잘 먹었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Q_증조할아버지이신 장씨 삼형제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내게로 큰증조 할아버지이신 장경삼 어르신은 일찌기 서울에 가셔서 과거를 보실려고 했는디 당시 벼슬을 사고 파는 매관매직이 심했는갑디다. 이러면 시험봐봤자 소용이 없지요.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벼슬을 돈 주고 사고 파는디 되것어요. 그래서 고향으로 다시 내려와 가지고 있는디 함평에 유명한 동학 접주 이화진이가 장경삼 어르신 동생 장옥삼 어르신의 고숙이란 말이요. 이 분은 우리 마을에서 쪼금 가면 나오는 죽장에서 사셨어요. 이분이 거병을 할려고 하는데 제 힘으로는 부족하니 도와주세요하고 청을 했어요.

 

그때 우리 증조할아버지들이 함평에서 인심을 안 잃었는 갑디다. 재물도 제법 있고 해서 모병을 해가지고 우리 옆 마을 괴치 마을 앞에서 훈련을 했어요. 그래서 이 들판을 우리 장씨 증조할아버지 삼형제를 뜻하는 삼장들이라 불르는데 이 말이 삼정들로 변해서 그리 부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제가 어렸을 때 듣기로는 삼장들에서 훈련을 받은 동학군이 무안으로 가서 고막포전투에 참가 했다고 들었어요. 제가 잘은 모르지만 이교수님이랑 써놓은 걸 보니 교수님들도 그렇게 써놓았드만요.

증조 삼형제 할아버지는 고막포전투에서 패해 가지고 무안쪽으로 도망을 갔어요. 큰증조는 화상을 입어서 바로 잡혀 129일에 처형을 당했고, 옥삼, 공삼 증조 할아버지는 217일 나중에 잡혀 끌려가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현재 묘지는 다 흩어져 있습니다. 제 직계인 옥삼증조할아버지는 고막천 인근에 시수에 안장 되어 계십니다.

 

삼형제가 다 돌아가시고 전라감사 이도재라는 분이 함평으로 오셨다고 그래요. 전라감사가 내려와서 동학에 가담 정도가 약한 백성들은 풀어주고 그랬는 갑디다. 그런데 이 이도재 감사는 우리 경삼 큰증조 할아버지와 당시 한양에서 과거를 보면서 친하게 지냈는갑습디다. 함평에 오셔가지고 경삼이 자식들을 찾아 강제로 뺏긴 전답이고 뭐고 다 찾아서 줬다고 해요. 그런디 이 문서를 들고 작곡재를 넘어오는데 테러를 당해 다 뺏겨 부렀지요. 그래 먹고 살게 없은 게 후손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 버렸어요.

 

Q_함평에서는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기록이나 역사적인 현장을 보존하는 일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함평동학농민혁명에 관하여 조언을 하신다면?

그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함평동학농민혁명 관련 후손들을 서둘러 찾아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전에 저와 같이 조상이 동학혁명 당시 활약한 분들 후손들이 계시는 데 제가 나이를 먹다보니 함께 활동했던 분들 이름이 얼른 생각이 안 나네요. 월야 진주정씨 정평오라는 분의 후손, 손불에 임씨로 기억하는데 이분들 외에 많은 분이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장원석 전교와의 전화통화는 마치 이어달리기 계주 경기에서 버튼을 터치하는 순간 간절한 눈빛과 몸짓이 전해 오는 듯 하였다.

 

장원석 전교가 사천마을 동학혁명기념탑을 스스로 세우고 완성해 낸 것처럼 함평동학농민기념사업회 설립과 함평동학농민혁명의 기초자료 수집, 유적지 발굴과 보전은 우리 세대에 꼭 해내야 할 임무다.

이 임무는 416일 있을 함평동학농민 기념사업회 발족으로 시작되고 시작은 곧 반이다라는 말처럼 잘 진행되리라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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