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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노트]함평에 도요지를 찾아서-1:함평방송

[취재노트]함평에 도요지를 찾아서-1

ㅡ함평 청자 도요지, 사기 도요지는 어디일까?

최창호 대표기자 | 입력 : 2022/08/20 [14:34]

 

▲ 손불면 양재리 장재마을은 함평군사에 의하면 청자 도요지가 있는 곳이다. 번짓수가 없어 탐문조사가 필요했다.    

 

 

7월 29일, 한낮의 더위를 피해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나는 함평방송 사무실을 나섰다.

많은 함평 사람들께 '함평 땅은 도자기를 만든 고장이다.'
'청자뿐만 아니라 사기, 백자, 옹기를 생산해낸 곳이 함평천지다.'
그 맥이 이어져 현대에 와서는 '행남자기'로 유명한 자기 회사, 계열회사였던 '행천자기'가 있던 곳! '도자기 고장이 바로 함평이다.'
소리내어 알리고 싶어서였다.

함평에 전통, 역사를 안다는 것은 우리 함평을 더 깊이 있고 풍요롭게 만드는 토대가 된다.

몇년전 함평군에는 자동차극장이 생겼다.
영화관 대신 야외에 세운 자동차극장은 코로나 시대, 비대면이 일상이 되면서 주변 대도시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 있는 데이트 장소가 되었다.

문제는 앞으로 자동차극장을 사랑받게 하려면 튼튼한 뿌리가 있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함평의 전통과 역사 속에서 영화와 관련 하여 큰 인물이 있다.
바로 '최금동'이라는 대동면 향교 출신의 시나리오 작가다.
대한민국 영화사를 얘기하자면 꼭 등장하는 훌륭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함평 자동차 극장을 지금부터라도 최금동과 연관지어 알려나가야 한다.

함평 도자기에 대해서도 '취재하여 알려야겠다.'라는 생각은 위에서 언급한 함평자동차극장과 최금동을 연관 지으려는 까닭과 결이 같다.

함평에 관광하러 온 사람들에게 볼거리, 체험거리로 도자기는 좋은 소재다.
그렇지만 도자기 뿌리가 없는 곳에서 도자기 구경, 도자기 만들기 체험은 깊이가 없다. 관광객들의 외면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런저런 생각끝에 더위가 최고조인 이 날. 나는 '함평 청자도요지를 찾아야 한다.'라는 오래전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그 날 거사를 꾸미려는 듯한 각오로 나는 손불쪽으로 차를 몰았다.


청자 도요지는 양재리에 있음을 여러 기록을 통해 먼저 알고 있었다. 양재리로 출발하기 전에 양재리에서 장재마을 어딘가에 도요지가 있다는 사실도 파악해 둔 상태였다.

해는 벌써 서산에 걸쳐 있었다. 어둠이 내리는 저녁 8시까지  시간은 고작 2시간 남짓.
이 시간 안에 '청자 도요지를 찾아야 된다.'라는 강박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장재리 동네에 들어 섰다. 마을 사람을 만나는 일이 우선이었다. 마침 길가에서 보이는 대문 너머로 일을 하고 계시는 부부가 보였다.

"어르신, 이 동네 청자 도요지가 어디쯤 있습니까?"
함평방송에서 나왔다면서 여쭈었더니
"청자 도요지요? 몇해전에 저 대밭 뒤에서 포크레인으로 파고 그럽디다."


생각보다 쉽게 '한방에 장소를 찾았다.'라는 생각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마을 어르신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대밭은 불과 50 미터 거리 안에 있었다.
대밭이 있는 곳으로 가서 다시 여쭈어 볼려고 집안을 살폈다. 뜻 밖의 젊은 사람들 서너명이 집안에 계셨다.


"청자도요지를 찾으려고 왔는데 여기 어디쯤이라고 동네 분이 말씀하셔서 찾아왔습니다."
"청자도요지요? 저희는 이 동네에서 산지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는데요. 그런 게 있어요?"

분명 대나무 뒤쪽인데 바로 앞집인데도 모르신다싶어 다시 처음 뵜던 어르신 댁으로 갈려고 할 때였다. 첫 번째 집 옆으로 나오니 담장과 대문이 꽤 높아 보이는 곳에 '두런두런' 사람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실례합니다."를 두세 번 외쳤다.

다행히 대문 안에서 "누구시오?"라는 대답이 들렸다.

"청자도요지를 찾으러 왔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아! 청자 도요지요." 하고 대문을 열어 주셨다.


이집은 문패가 다른 집과 달리 여자 이름이 먼저 써져 있었다.

"문패 이름이 부인이십니까?"

"아니요. 어머님이십니다."

"그러면 아버님이 강석주님이시겠네요."
"네, 아버님은 돌아가셨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씀에 나는 얼른 문패 얘기는 입을 닫았다.

"제가 영광에 살아서 자주 들려요. 어머니 혼자 계시니까요."
그 사이 앞장선 강성태 님은
대밭 사이로 난 길을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 함평 청자 도요지를 안내하기 위해 앞장서서 가시는 뒷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 취재를 도와주시는 마음 씀씀이가 참 고마웠다.    

 

"이 대밭에 길 내니라고 혼자 엄청 고생했습니다."
청자 도요지를 향해 걷는 분의 뒷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 청자 도요지터는 현재 밭으로 사용중이다.몇년전에 문화재청에서 발굴조사를 하고 간 것으로 마을사람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대나무 밭 사이 계단 끝까지 오르니 먼저 논이 나왔다.
"저기 고라니 못 들어가게 그물 쳐놓은 곳하고 여기 그물 쳐져 있는 밭 있죠? 이 두 군데예요. 2년전인가  청자 가마터를 찾는다고 문화재 연구하시는 분들이 포크레인으로 파고 했어요."


마을에서 처음 만난 어르신과 똑같은 얘기를 하셨다.

산이 끝나는 비탈면이다.이 곳에 청자가마터를 만들고 그 때는 동네 까지 바닷물이 갯골을 타고 들어왔을 테니 나룻배로 그릇을 운반 했을 거라는 추측을 하였다.

"우리 어렸을 때 보면 이 밭에 청자 파편이 많이 나왔어요."
땅 속을 파헤쳐 청자 파편 하나라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셨을까? 이리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농작물이 심어진 밭을 헤집고 다닐 수는 없었다. 서운함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대밭 계단으로 돌아서 내려 왔다.
그렇지만 이미 나는 함평에 청자 도요지를 쉽게 찾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 손불면 북성리 사기마을은 마을 이름부터 사기를 만들었던 동네임을 알 수 있다. 3군데 도요지가 있음을 이번에 확인하였다. 

 

이제 사기 마을로 갈 차례다.

사기 마을은 말 그대로 사기를 제작했던 마을이다.

양재리에서 나와 다시 북성리 사기마을로 향했다.

직선 길로는 그렇게 멀지 않는 거리다. 찻길로 가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삥 둘러 유자 모양으로 가야한다. 걸어 다녔을 당시에는 바로 이웃 마을 이라 가깝게 왕래 했을거라는 생각을 잠시 하였다.

사기마을에서도 마찬가지로 탐문을 해야 했다.
마침 할머니 한 분이 동네 정자에 나와 계셨다.
인사를  드리고 사기를 굽던 가마터가 어디인지를 여쭤봤다.

할머니는 "잘 모르것오. 들어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씀하셨다.

'이대로 사기를 굽던 곳을 찾을 수가 없을려나보다.' 하고 생각 되어졌다.

 

그러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오기가 났다. 무턱대고 산 쪽으로 향했다.

상당히 높은 산 중턱까지 임도 길을 올라갔다.

눈을 크게 뜨고 도요지라고 생긴 곳을 찾으려 애를 써봤다. 

순간 다시 부정의 감정이 생겼다.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하는 게 아닌가?' 

산길을 내려와 다시 동네로 접어들었다. 그 때였다.
일을 끝내고 마당에 서 계시는 것 같은 마을 주민 김영근 씨를  만났다.
사기마을을 찾아 온 연유를 말씀 드렸다.
김영근 씨는 내 얘기를 듣고 나를 쳐다보더니 같이 가보자고 하였다.

나는 김영근씨를 차에 태우고 다시 내려왔던 산길을 올라갔다.

얼마쯤 가서 차를 세웠다. 앞장서서 가는 김영근 씨를 나는 따라나섰다.
그러면서 내 속으로 '오늘은 참으로 운이 좋은 날이다. 어떻게 이렇게 사기 도요지도 쉽게 찾을 수 있지?'


그때였다.


"여기가 바로 도요지예요. 여기서 쟁기질을 할 때 보면 파편들이 많이 나왔어요."

"아! 그러면 이 동네에서 예전에 쟁기질을 하셨어요?"
"그래요. 저는 젊었을 때부터 소로 쟁기질을 많이 하고 다녔어요. 이 일대  논 밭 속은 훤히 알아요."
'아! 이렇게 쉽게 일이 풀릴 수 있을까!'
난 다시 한번 마음 속으로 '아싸!' 하고 즐거운 소리를 냈다.

"저쪽 저수지 넘어서 밭에서도 파편이 많이 나왔어요."
김용근 님은 또 다른 곳의 도요지를 말씀하셨다.

나는 다시 차를 몰아 저수쪽으로 향했다. 그 밭은 이미 묵전이 되어 있었다.

 

▲ 사기마을 두번째 도자기터는 마을 위 저수지에서 위쪽으로 대나무 아래 묵답으로 확인되었다.    

 

"저기 대나무 밑으로 있죠? 거기 밭자리가 도자기 파편들이 많이 나왔던 곳입니다."

사기 마을 가마터도 양재리 장재 청자 도요지 터와 지형은 비슷했다. 산자락이 끝나는 완만한 경사지였다.

저녁 8시가 넘어섰는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김용근 님은 다급히 말씀하셨다.
"또 한 곳이 있어요."

차를 몰아 마을로 내려가려고 할 때 김영근 님은 말씀하셨다.

"왜? 또 있어요?"
나는 도요지가 또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한 마을에 3곳이나 도요지가 있다는 게 안 믿겨졌다.


"날이 어두워지니 거기 갔다가 나를 다시 우리 집으로 와서 내려주고 갈라믄 시간이 걸리니까 내가 내 트럭을 몰고 갈 테니까 따라 오시오."
'이렇게 친절하실 수가.'
나는 김영근 님 뒤를 따라서 사기 마을 한참 아래까지 내려갔다.

 

▲ 사기마을 제일 아래에 위치한 도요지에서 비교적 온전한 사기 그릇을 김영근 님이 직접 흙에서 파서 보여주셨다.    

 

그 곳에서 나는 뜻밖에 보물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은 산이 끝나는 지점에 도요지 중간쯤을 경사 지게 깎아져 있었다.

일부는 밭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경사진 면에는 사기 파편들이 눈에 쉽게 들어왔다.
김영근 님이 사기 파편을 흙 속에서 파 보였다.

 

▲ 손불 사기마을에서 발견한 사기그릇, 카메라를 그릇 아래쪽에서 찍으니 깨진 그릇이 아니다. 메이드 인 함평 사기 그릇으로 참 멋지다.    

 

그 가운데 한쪽 귀퉁이만 깨졌지만 온전하게 보이는 사발그릇이 있었다.
쓱쓱 손으로 닦으시더니 "여기 온 기념이요."
사기그릇을 나에게 주셨다. (다음 호에 계속 됩니다.)

 

▲ 요즘으로 치면 밥 그릇으로 썼을 법한 사기그릇. 한쪽 귀퉁이가 깨졌어도 당시 사기 그릇을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볼 수 있어서 큰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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