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칠줄 모르는, 실천하는 지식인 나간채 교수

최창호 대표기자 | 입력 : 2024/05/15 [13:54]

 

▲ 함평에 대표적인 행동하는 지식인 나간채 교수를 진례 자택에서 만났다.

 

 

 

Q-나간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본인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안고 질문에 응답하려 합니다. 제 인생은 함평 학다리 진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소 가난하지만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그곳에서 살다가 대학에 가게 되어 고향을 떠났습니다. 공주사범대학을 마치고(1972) 중학교 교사로 2년 동안 근무하다가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1977) 사회학을 전공했습니다(사회학박사 ). 전남대학교 사회학과에 부임하여(1981) 33년 동안 봉직한 후 2014년에 정년을 맞아 퇴임했습니다. 늦게야 철든다 하더니, 퇴임 후에야 비로소 인생에 중요한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뿌리를 향한 그리움과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었습니다.

 

Q_교수님께서는 교수 재직 시에도 그랬지만 퇴직 후에도 현실 참여운동을 꾸준히 하고 계시는데 이 활동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현실문제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 2학년 때인 19695박정희3선개헌반대시위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에 분노하여 앞장섰다가 징계를 받은 적이 있거든요. 그 후에는 전남대에 자리를 잡고 나서부터 인가 봅니다. 부임당시 5·18광주민중항쟁 직후였기 때문에 전두환 비판운동이 큰 흐름을 이루던 시기였습니다. 중점적 연구와 강의분야가 사회운동이어서 5·18항쟁관련 연구를 주로 했고, 아울러 전남대 5·18연구소장, 사회과학대학 학장, 한국지역사회회장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활동으로는 대통령직속 국가인적자원위원회 위원(2007), 32주년5·18행사위원회 상임위원장(2012), 5·18기록관 초대 관장(2017) 등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현실문제에 관한 사회운동분야에는 부임 이후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활동을 근간으로 하여 지방분권운동, 새교육공동체운동, 대운하반대운동 등 정치민주화운동에 참여했지요.

 

그리고, 정년 후에는 학술분야 사회운동으로 방향을 바꿔서 화순실학기념사업회(2018)와 바른역사시민연대(2022)를 창립하여 상임대표로 활동해오고 있습니다. 화순실학기념사업회를 창립하여 실학운동을 실천한 기본적 문제의식은 지역학 정립과 직접 관련합니다. 한국에는 중국 유학과 성리학이 도입된 이후, 퇴계의 조선성리학이 학계를 주도하는 중심학문으로 성장하였으며, 퇴계 이후에는 이들이 사림정체세력으로 발전하여 학문세계는 물론 정치권력을 지향하는 흐름으로 발전했지요. 그런데 임진왜란(1592-7)과 병자호란(1636-7)을 경과하면서 조선사회가 밑바닥부터 전체적으로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성리학이 비현실적 과제에 매몰되어 현실문제(신분차별, 귀족축재, 양민수탈 등)를 외면하는 시국에서, 이를 비판하고 실제적, 민중적인 과제를 연구했던 학문이 바로 실학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새롭게 생활문제에 관심을 갖던 조선후기 실학의 큰 흐름이 호남에서 발전했던 사실은 저에게 큰 충격이고 자랑스러운 역사로 다가왔습니다(영남에는 실학이 거의 없음). 전북 부안에서 경제학을 실용적으로 탐구했던 유형원(1622-73), 그리고 전남 강진의 정약용(1762-1736), 위백규 등이 대표적 사례에 속하지요. 이와 아울러 전북 출신 황윤석, 신경준, 이기, 그리고 특히 전남 화순에서 활동한 하백원, 나경적 등 뛰어난 實學者群(실학자군)이 호남지역 17-18세기에 의미 깊은 학문발전의 물결을 전개했던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화순실학기념사업회 창립에 앞장섰고 그에 관한 기념사업을 계속해 왔던 것입니다. 그 결과, 화순실학은 호남실학 및 호남학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이라는 인식을 공감하게 되었고, 이에 바탕하여 한국학호남진흥원이 호남 지역학의 맥락에서 장기연구과제로 설정-연구되도록 진흥원과 협약을 이루어 낸바 있습니다.

 

다음에는 그 이후에 시작한 <바른역사시민연대> 활동에 관해 소개하려 합니다. 정년을 하고 나서 어느 여름날 한 역사학자의 특강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말인 즉,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이 친일본 역사학자들에 의해 사실과 달리 조작되고 왜곡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단군이 일본 시조의 후손이라고 강변하는가 하면, 중학교 때 한사군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다고 배웠는데, 이 역사학자의 말에 의하면 낙랑군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북경 근방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중국 역사책에 근거), 더 나아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년대(서기 전후 1세기)를 친일사학자들은 서기 3-4세기라고 늦추어 주장함으로써 우리 역사를 후진화시키려 왜곡하는 등 입니다. 이 일본의 식민사관은 정치적 책략의 일환으로 우리역사를 야만적이고 후진적이라고 규정하며, 그 바탕에서 침략과 정복의 대상으로 격하시키려는 탐욕적 시각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친일식민사학의 역사왜곡 앞에서 이 문제가 바르게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 국가민족에 미래가 없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라 모른 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현실에 대한 우울함, 미래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그에 따른 정신적 분노의 정서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 위당 정인보 선생이 말했듯이 역사는 국가민족의 혼이고 얼이어서, 이 혼과 얼이 병들면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고려 말기에 원나라의 횡포와 조선조 이후 일제 식민지 침략의 역사가 이를 엄중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병든 우리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한 <바른역사시민연대>20233월에 창립하고 상임대표 역할을 맡아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20231년 동안 숨 가쁘게 싸워왔던 과제가 <전라도천년사> 폐기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이 문제가 작년 10월 국회의 국정감사 의제로 결정되어 공식적으로 논란되고 비판됨으로써 바른 해결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상태에 도달해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물론 이 과제에 관한 운동은 금년에도 더 체계적이고 강력하게 전개하여 잘못된 역사를 바른 역사로 바로세우는 운동을 계속할 것입니다.

 

Q_<전라도천년사>책의 역사왜곡을 바로 잡는데 교수님께서 온 힘을 쓰고 계시는군요.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주실까요?

 

이 역사책은 전라도가 이 명칭을 공식적으로 확정한 지 천년이 지난 역사를 기념하여 그 천년의 역사서를 만들자는 목적으로 추진된 사업입니다. 전남과 전북 및 광주광역시 3곳의 광역자치단체가 이 1천년 역사를 기념하는 공동사업으로 추진했고, 그 중에서 전라북도가 주관했습니다. 연구기간은 5(2018~2022), 연구예산은 24억 원으로 전북연구원이 위탁받아 진행한 결과, 전체 35권의 총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집필자 213, 분량 약13,000여 쪽). 주최측은 이 총서를 2022년 말에 간행하여 배포할 계획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책이 인쇄되어 배포되기 직전에 책 내용에 식민사관의 흔적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우리나라의 지도에 있는 현재 지명을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옛날 지명 그대로 표기했다는 것, 즉 남원을 기문이라고 했고, 강진을 침미다례 등으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하자면 독도를 죽도로 쓰고 다케시마로 말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밖에도 고조선 역사를 왜곡하고 단군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문제, 근대역사에서는 지역의 정체성과 자긍심 발전에 역행하는 서술이 적지 않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리하여 관련된 시민사회가 두 달 동안에 걸쳐 검증한 결과, 오류와 이의제기가 150여 건에 이르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우리 지역 시민사회와 NGO들이 반대성명, 항의방문, 비판기자회견을 가졌고, 더 나아가 항의농성, 피켓시위 등을 계속하여 감행했습니다. 시의회와 국회의원 및 시장군수협의회에서도 적극적인 비판성명이 연이어 발표되었습니다. 이와 다른 한편으로 신문지상과 티브이 공개토론에 이어 국회토론회 및 국정감사 토론회가 이어졌습니다. 특히 국정감사 결과 국회의원들이 3개 시,도지사들에게 비판적 권고의견을 보낸 후, 인쇄작업이 완료된 이 총서가 배포되지 못한 채 묶여있는 상태입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곳이 다소 있더라도 큰 사업이니 배포하자는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서 막걸리 통에 독약이 몇 방울 섞여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다 버려야 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우리 민족과 국민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이 독약을, 알면서도, 마시게 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024년을 맞이하여 올해에도 우리는 이 잘못된 역사책을 폐기하고 올바른 역사책을 만들어 냄으로써 우리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지역민의 역사 인식을 드높이는 운동을 계속할 계획입니다.

 

Q_교수님께서 퇴직 이후로도 힘차게 사회참여운동을 하고 계시는데 그 원동력이랄까? 그 게 뭔지요?

 

A- 살아오면서 그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지침이나 기준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 삶의 동력, 동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는 간단하게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그 질문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살아가는데 나침반이 된 것을 말하면 될 것 같고, 두 번째는 그 나침반의 방향길에서 맞이하게 되는 파도의 고도와 속도 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삶의 나침반에서 대학의 선택, 직업의 선택, 일자리 선택 등은 특별한 갈등이나 고민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대학과 직업의 선택은 선생님의 추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실천한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각각의 추천을 무조건 수용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추천내용 자체가 제 자신이 적극적으로 선택할 범위 내에 있었고, 그 선택에 큰 위험이나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나침반에서 더 구체적인 위험의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신체 안전의 위험, 직장 상실의 위험, 사적 이익의 유혹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 경우에 한하여 나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부끄러움 없는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1969년 학부 2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 삼선개헌 반대 집회를 주도했을 때를 지금 돌이켜 보면, 한정적이었지만 감옥에 갈 정도의 각오는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전남대학에 재직 중에 전두환 정권 저항운동에 참여할 때도 직장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내 인생의 행로를 되돌아보면, 생명의 위험이 걸쳐있는 거친 절벽을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잘 닦아진 도로를 따라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여러 선택들은 결국 개인이 처한 국면에서 자아의식과 대상현실과의 상호작용, 일종의 순화된 변증법적 생존방식을 통해 진전되었던 것입니다. 지나온 1980년대 이후 수많은 열사들의 생명을 건 최종적 선택이 이어지던 시간을 돌이켜 생각할 때, 이 열사들은 살아남은 자들보다 더 뜨겁고 화염에 쌓인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했다는 것이 저의 인식입니다. 물론 이러한 선택은 아()와 비아(非我) 간의 관계 속에서,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과의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어느 일방의 단일한 결정론적 결과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로 삶의 동력에 관한 것입니다. 이건 마음에 장착된 엔진의 성능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이는 정신적 단련의 결과로서 결정되는 의지력과 시행착오에 대한 저항력에 관련된다고 봅니다. 절벽을 타오르는 담대함, 폭풍의 바다를 거스르며 헤엄치는 도전의지는 결국 마음의 산맥 깊은 곳에 뻗어온 광맥의 보석같이, 그리고 알알이 맺혀진 진주 같은 강인한 결정력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삶은 비록 오랜 세월의 흐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매우 순간적인 선택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마음이 서로 대화하는 물결에 따라서 인생의 길은 여러 갈래를 따라 흘러가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작년 9월 말쯤 일입니다. <전라도천년사> 폐기운동이 결정적 국면에 접근해가고 있다고 생각되는 때였습니다. 상임대표로서 이 운동의 운명이 맞이한 중대한 장벽을 앞에 두고 단식농성을 결행하기 위해 주위와 상의하는 순간을 돌이켜 상상해 봅니다. 결국 우리가 삶에서 맞서고, 넘어야 할 고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그 공포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간채 교수의 진례에 지어진 집은 2층으로 진례뜰과 속금산 자락이 한 눈에 들어온다.

 

 

 

Q_고향 함평에 대하여 교수님의 소회를 말씀해주십시오.

 

어렸을 적 몇 가지 기억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재학시절, 그리고 초등학교 이전의 소년시절에 관한 것으로 제한됩니다. 그 시절에 지역사회에 관하여 인상 깊게 남아있던 기억은 진례의 넓은 평야와 영산강에 굽이치는 물결처럼 출렁이며 흘렀습니다. 벼농사가 풍성하게 익어가는 금빛 가을 들판, 그날 둥근 보름달빛 아래 저수지 뚝방에서 목청껏 노래하던 밤이 기억에 남습니다. 영산강은 이 평야에 해마다 물바다를 만들곤 했습니다. 여름 장마철이 오면, 그 넓은 들판이 하얀 강물로 덮여 바다처럼 넓고 멀리까지 가득하게 보였습니다. 벼농사가 시작될 초여름 달밤에 횃불 켜고 뻘 자국 구멍을 찾아 게 잡이 나서던 처녀 총각들의 가슴 부풀어 오르던 모습, 겨울 영산강 중천포에는 친구의 그물에 걸려 올라온 싱싱한 잉어가 펄떡이던 모습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객지생활을 하면서 내 고향 함평이 우리 역사의 길목을 빛나게 장식되었던 모습은 만나보기 어려웠습니다. 한국 정치와 사회, 경제와 문화의 영역에서 함평이 남긴 두드러진 족적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함평 출신의 위대한 정치가와 예술가, 대 재벌이나 역사를 빛낸 학자들, 문화와 예술인들도 한국 역사의 흐름 속에서 쉽게 만나지 못했습니다. 함평에서 보이는 이 역사의 빈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나는 더 기본적인 의문으로부터 문제를 살피고자 합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간의 대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말에서 보듯이, 역사는 결국 역사가가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가가 함평을 역사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조정래가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을 통해, 그리고 한강이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을 통해 역사를 만들었듯이. 이제 늦게야 철이 들어 고향에 돌아왔으니, 다시 그 질문에 담겨 있는 답을 가까이서 찾아보려 합니다.

 

▲정년 퇴임을 하고서도 여전히 현실참여 운동으로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잘 알려진 나간채 교수. 그에게 마음의 평안을 안겨주는 고향 집 앞 마당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여전히 아름답다.

 

  

Q_교수님께서 자라온 환경에 대해 말씀을 해주셨는데 교수님 가족중에 아버비, 어머니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A-우리 아버지는 반()소작의 하층 농민 출신입니다. 돌날에 아버지(나간채 교수의 할아버지)를 여윈 독자로 태어나 청상과부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났습니다. 마을 뒤편 외딴 귀퉁이의 단칸방 오두막에서 형제 없이 자란 외톨이였습니다. 아버지는 가난했고, 친구도 없었으며, 학교에는 가본 적이 없는 무학자이었습니다. 가진 것 없고, 아버지도 형제도 없는 독자이었기에 그냥 홀로 일하고, 홀로 놀고, 홀로 길을 걸어가곤 했습니다. 그런 삶 속에서 아버지가 감내해 온 고독과 무력감은 바깥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집안에서의 폭력성으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자주 화를 내셨고, 핏발서린 눈빛에서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아버지를 나는 미워하고 피했습니다.

 

그 때는 몰랐고 늦게야 깨우쳐 알게 된 당신의 고독, 주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에 대하여, 그래서 그런 아버지를 외면하고 증오했던 나의 철없던 시절의 우행을 이제 반성하고 위로하며, 안타까운 눈물의 인사를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 아들 품에 안겨 이승을 떠나면서 보여주신 입가의 가벼운 미소가 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선물이었음을 마음에 새기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향교 유림 출신의 딸입니다. 다소 세련되고 총명하며 적극적 활동력이 두드러진 여성이 짝을 잘 못 만나 수난에 찬 시골아낙네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환난의 세월을 눈물 속에 보내시다가, 마음을 다잡고 매서운 솜씨로 살림을 일으켜 안정된 가정을 꾸려냈으며, 친정 부모와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잘 모셔서 향교에서 주는 효부상(孝婦賞)을 받으시기도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에 대하여 한 가지 기억은 두려움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께서 함평 장날 소 팔러 갔다가 밤늦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인가 없는 먼 산길을 홀로 마중 나가던 모습을 보면서 그 담대함에 놀랐던 생각이 납니다. 유식한 동네 남자들과도, 농사철 물 대기 할 때도 남편 대신 나서서 사리를 논박하고 다투어 이들에게 지지 않고 자기 몫을 지켜내셨습니다. 이승을 떠나신지 10여년이 지났지만, 생전에 살아 활동하시던 시절 어느 때 쯤 어머니의 삶에 대하여 궁금한 게 생겼었습니다. 어느 날 조심스럽게 질문을 드렸습니다. “제가 볼 때 이 집으로 시집을 오지 않을 분인 것 같은데, 어떻게 이 집에 오셨는가요?” 어머니는 잘 모르고 왔다고 응답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속에 쌓인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하려 하시길래, 말로 하시지 말고 글로 쓰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큰 아들이 쓰고 버린 공책 뒷면에다 원고지 150매 정도의 이야기를 남겨 놓고 가셨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一口難說(일구난설)이요, 一筆難記(일필난기)오나 대강 기록해......“라고 써놓으신 것을 보면(793), 지금은 이승에 안 계신 어머니 마음의 폭과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Q_교수님께서 몇해 전에 고향 땅 진례에 집을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얘기를 좀 해 주십시오.

 

A-정년 후, 저는 여유가 있을 때 가끔 광주호 동북쪽 산자락에 자리 잡은 '식영정'에 가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마루에 걸터앉아 광주호가 출렁이며 속삭이는 말을 듣기도 하고, 마루에 누워서 흘러가는 구름에게 가는 곳을 묻기도 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식영정현판들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이 정자는 조선 선비 임억령을 위해 사위가 되는 김성헌이 지어드렸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아들은 서울 생활이지만, 마침 두 딸 가족이 광주에 함께 살다보니 가끔 집에서 술판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어느 날 두 딸, 사위 가족들과 한 잔 마시면서 "그대들 식영정을 가본 적이 있는가?" 물었더니 다들 "가본 적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정자가 어찌 세워졌는지 아는가?" 했더니 "모른다"고 답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 정자는 장인을 위해서 사위가 지어 드린 것이라고 현판에 쓰여 있다네, 나중에 한 번 보시게." 그랬더니 큰 사위가 대뜸 물었습니다. "아버님, 그러면 제가 하나 지어드릴까요?"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어서 "정히 그렇다면 술 깨서 정신 차리고 잘 생각하여 말하라"고 하는 정도로 끝낸 적이 있었습니다.

 

며칠 후부터 텃밭이 되었던 나의 시골 옛 집터에 새 집을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 만들어지는 건물의 밑바닥에 묻혀 있을 옛날의 흔적을 그려보며 그 집에서 살던 날을 반추해 보기도 했습니다. 공사를 시작한 지 두 해 만에 새 집이 들어섰습니다. 외형은 다르지만 옛날 초가집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다 크기와 방향이 거의 같게 지은 2층집이었습니다. 마루에서 바라보면 동남쪽 저 멀리 희미하게 솟아있던 '월출산' 상봉이 그때처럼 모습을 보여주니, 마음에 반가움이 잔잔히 피어오릅니다. 집 앞 길가에 장대한 팽나무와 그 그늘 아래 쉼 없이 솟아올라 마을 사람들 갈등을 풀어주고 어머니의 새벽기도를 위한 정화수를 마련해 주던 맑은 샘물, 건너 마을 우뚝한 '속금산'과 넓고 풍요한 들판, 그리고 '석관정'을 돌아 흐르는 영산강 물결은 지금도 그 때처럼 제 마음을 출렁이게 합니다. 그 강물이 여름 홍수철에는 넓은 진례 들판을 가득히 차올라서 큰 바다같이 하얗게, 멀고 아득한 느낌을 주었던 기억이 내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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