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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청춘은 의구하다”:함평방송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청춘은 의구하다”

이병술_서양화가

조영인 기자 | 입력 : 2024/03/04 [09:50]

 

서양화가 이병술 화백은 1939년 태생으로 혼란한 정세의 터널을 지나왔다. 해방에서부터 6.25 전쟁을 겪은 기억까지 간직한 여든다섯의 연세로 몸은 쇠약해졌을지 몰라도 예술 활동에 대한 열정만은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이다.

 

함평군 신광면 연천마을에서 태어나 전쟁을 겪었다. 이병술 화백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지만 신광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5학년이 되자마자 6.25 전시 상황에 휩쓸리면서 학업을 중단한다. 기독교 신앙을 믿는다는 이유로 공산당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표적이 되어, 온 가족이 함께 다닌 신광가덕교회를 더 이상 출석할 수 없게 되었다. 함평읍으로 이사를 와 함평읍교회 유년주일학교를 다니며, 함평초등학교로 편입하게 되었다.

 

다행히 이병술 화백은 1952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함평 중학교까지 순탄히 교육을 마친다. 전쟁의 여파로 초,중학생 할 것 없이 전부 군사 훈련을 받으며 구호물자를 원조받았던 시기임을 고려해보면, 지난한 상황 속에서도 삶을 도야(陶冶)하는 일만큼은 관심을 져버릴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한다.

 

그는 하나님 사랑, 자연사랑, 농촌 사랑이라는 이상향을 품고 산 사리분별한 아이었다. 미술 사랑은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학생으로서 꾸준히 교회에 다니며 성인이 되어서도 교회학교, 학생회, 청년회에 참여하며 교육에 일조하였다. 교회 내부 성단 장식까지 눈을 돌리는 등 특히나 그림 그리는 활동에 열렬함을 표출하였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이병술씨는 점점 서양미술에 눈뜬다. 유화의 매력에 흠뻑 빠진 그는 서양화에 대한 무지가 만연한 시대에 관련 미술 서적을 구입하면서 시야를 넓힌다.

 

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거닐면서 동산에 떠오르는 밝고 빛나는 태양과 저녁에는 조용히 떠오르는 달과 밤하늘에 빛나는 무수한 별들과 날아다니는 새,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신비감을 느끼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한다. 그 당시에는 유화물감과 캔버스 구입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서 유화물감 대신 페인트를 이용하고, 캔버스도 손수 만들어 사용하였다.

 

석양이 물들어가는 너른 들녘에서 한 가난한 농부 부부가 일손을 놓고 멀리 교회당에서 들려오는 저녁기도를 알리는 종소리에 맞춰 고개 숙여 기도하고 있는 모습인 밀레의 그림, ‘만종을 보고 있노라면 힘든 하루의 고단함이 상쇄되고 숭고함까지 느껴져요.”

 

그는 유독 프랑스 화가인 장 프랑수아 밀레를 좋아한다. 밀레는 진지한 태도로 농민생활에서 취재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인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한 작가다. 밀레는 다른 화가들과 달리 풍경보다 농민생활을 더 많이 그린 서양화가에 속한다.

 

▲ 이병술 화백의 마당 한켠에 진행중인 벽화와 작업실    

 

 

 

이병술 화백은 밀레의 작품 중에서 이삭 줍는 여인들(1857), 만종(1859) 작품에 홀연히 빠지게 되고 천착하다시피 두 그림에 매료되었다. 밀레의 작품은 혹여나 그 그림을 본 농민들이 마음을 동요할까 전전긍긍한 부르주아들의 신랄한 혹평을 받았다.

밀레는 부농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후에 기울어진 가세로 가난한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 농촌을 사랑하기에 농촌의 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었고, 19세기 프랑스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밀레는 50대가 돼서야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파리 만국박람회에 이삭 줍는 여인들과 만종등이 출품되어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였다. 세계는 경제공황에 접어들었고 자연스럽게 집안도 어려워지게 되면서 급격한 고생과 가난에 시달리다 건강 악화로 61살에 세상을 떠났다.

 

이병술 화백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는 게 당연한 건실한 청년으로 자랐다. 깊은 신앙심은 밀레를 사랑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밀레와 같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생래적인 조건에서 비롯된 끌림과 시골 아이로 태어나 자란 천진함 때문인지 밀레 그림을 보고 동요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농촌의 목가적인 풍경에 담긴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현하는 화가가 되길 꿈꾼다. 영감을 자연에서 얻는 것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 함평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해, , , 구름, 산과 바다, 꽃을 그려서 종교적인 분위기로 심화하였고 압도감까지 선사했다. 일상적인 농촌의 그림을 그리면서 영적인 존재로 다가오는 종교적 신성함, 자연의 신비함을 담은 만종 그림을 방에 걸어 놓고 감상하기에 이르렀다.

 

세계 명화를 좋아하지만 미술 학도가 되는 정식 과정을 공부하기엔 어려운 가정 형편과 급변하는 시대적인 흐름은 총체적 난제였다. 그림만이 숨 쉬는 창구가 되어 주었다. 평생 미술을 희구하는 심정으로 광주 예술의 거리, 서울까지 가서 미술관을 방문하며 독학으로 서양미술과 종교화를 익혔다. 미술 서적을 참고해서 작품 묘사와 지식을 습득하였다. 회화를 넘어 사진, 음악, 영화 영상, 문학 등을 두루두루 배우고 싶었다. 사진 촬영, 스케치, 미술품 감상을 총망라하는 예술에 대한 관심을 근절시키는 것은 그의 탐구 능력을 제지하는 일이다. 밀레의 그림이 전시된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은 못 갔지만 액자 속 밀레의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심신의 안정을 느낀다.

 

1961년 군입대 후 이병술 화백은 논산훈련소에서도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조교들의 부탁을 받고 그림을 그려줬다. 이 기회로 5·16 군사쿠테타 시절, 6군단사령부 예하 부대에 배치를 받고 현황판 정리, 환경정리 임무를 수행했다. 제대해서는 본격적으로 교회에 상주하여 재능 기부를 펼쳤다. 함평읍교회 내 청년 교사, 학생회 교사, 청년회장, 남신도회장, 장로회 등 다양한 활동에 임했다.

 

이병술 화백을 포함한 함평읍교회 청년들은 지역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농촌,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문 교육만큼 중요한 신앙심을 기초로 인내와 노력을 배양했다. 그는 함평읍교회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광인고등공민학교에 미술교사로 채용되어 9년을 근무했다. 광인고등공민학교는 중학교 과정을 가르쳐서 검정고시를 볼 수 있게 도움을 주는 학교로 이병술 화백은 이 학교에서 최초로 미술부를 조직하여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이병술 화백은 광인고등공민학교에서 교사로 재직시에 배우자 정정자(77) 여사를 사귀게 되어 결혼하였다. 정여사는 함평군 학교면 마산리 표산마을에서 출생한 진주정씨이다. 정정자 여사는 신혼초부터 병환중인 시부모님을 모시고 교회에서는 교회직분을, 함평지역 사회에서는 함평군여성자원봉사회장과 여성단체협의회장으로 10여년동안 봉사활동을 펼쳤다 이 공로로 2004년에 함평군민의 상을 수상하였고 국무총리, 전남도지사, 여성부장관, 함평군수 표창등 다수의 표창을 받았다.

 

이병술 화백은 1970년도에 한 번 더 도약한다. 함평군 초,,고등학교 미술 교사를 모아 미술협회를 조직한 일이다.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친목을 필두로 학생미술실기 대회를 개최하며 학생들에게 미술교육을 장려·지도했다. 함께 활동한 회원은 10여 명으로 10년을 활동하였다. 그 후 이병술 화백이 미술교육을 위해 항진한 광인고등공민학교는 문교정책 변화와 학교 형편에 의하여 1982, 26회로 마지막 졸업생 총 1,152명을 배출 후 폐교되었다.

 

이병술 화백은 고향 농촌 부흥 발전을 위하여 단위농협을 입사하기 위해 1973년 시험을 치른 후 농협에 입사한다. 농협에서 25여년 동안 농촌 운동에 가담하며 199712월 농협에서 상무로 정년 퇴임하였다. 직장생활 중에도 교회 출석과 각 기관 및 교회 봉사에 손을 놓지 않았다. 하루가 쉴 새 없이 바쁜 농협 생활 덕에 미술 활동은 지엽적인 수준에 머물게 된다.

 

농협퇴사를 기점으로 그 동안 정체된 작품 제작과 작품활동에 대항하기로 결심한다. 자극제가 되어 한국기독교장로회 미술인 선교회에 가입하고 밀레의 영향을 받은 그답게 서양화 부분에 입각한 작품활동으로 기량을 펼친다. 2년에 한 번 열리는 미술 작품 전시회는 빠짐없이 참가하고 군산, 원주 경주 등 여러 지역에서 개최되는 전시회에 출품하였으며 2023년엔 신안군 자은도에서 회원작품전시회를 성황리 마무리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청춘은 의구하다

 

살아있다는 기분은 신앙과 미술, 삶 전반에 침투된 예술적인 원천에서 비롯된다. 농촌을 위해,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재능을 기부해오면서 생성된 자긍심은 자아를 분출해야만 삶의 질료를 충전하는 기분에 도달하는 열화와 같았다. 아흔에 가까운 나이에도 지칠 줄 모르는 이병술씨는 함평읍교회 남신도회, 여신도회 회보를 창간하고 표지화를 그렸다. 전남장로회 회보, 전국장로회 회보를 수차례 그린 것은 물론 함평읍교회 105년사 편찬위원장을 맡게 되어 교회 창립부터 105년 역사를 아우르는 교회사도 편찬했다. 이병술 화백은 이 과정에서 과로, 스트레스, 수면 부족으로 2020년부터 뇌경색, 뇌출혈이 오고 20216월 신장결석 제거수술을 받게 되었다.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여 다시 우리 지역 함평 풍광을 그리고 있다.

 

“Ars longa, vita brevis. = Art is long, life is short.”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서양 의학의 선구자 히포크라테스가 남긴 잠언집의 첫 문장에서 장착된 표현이다. 고대 그리스어로 작성된 원문의 뜻은 의술의 길은 먼데 인생은 짧도다이다. 영어 아트(art)의 어원이기도 한 원문 속 Ars는 테크네(technē), ‘기술이라는 뜻으로 ()’()’의 의미를 모두 함축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어구인 이 문장은 대상에 따라 활용되어 본질이 파생된 셈이다.

 

이병술 화백은 예술을 지속하는 데 밀레를 향한 찬사가 예술 인생의 맥락으로 작용했다. 때로는 당신의 행복회로를 돌리는 경험적 질료였다. 후대에 명징한 업적을 남기겠다는 거창한 포부는 없다. 그저 예술의 생명력이 주는 가치를 경험으로 증명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픈 인간의 순수 창작 활동이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 보자면, 차세대 후배들에게 세상을 탐미하는 어른의 지혜가 관철되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후배님들!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를 다하며 우리 고장 함평,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돕는 일을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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