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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우정의 등불'을 밝히며 장학사업을 펼쳐온 기부천사:함평방송

평생 '우정의 등불'을 밝히며 장학사업을 펼쳐온 기부천사

삼영산업(주) 고춘석 회장

2023-01-06     조영인 기자

 

 무안군 청계면과 제주 소재 석재물류센터 삼영산업()은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석재가공유통회사이다. 이 회사를 설립한 고춘석(68)회장은 제1대 전남장애인총연합회 김재무(전라남도체육회장) 후원회장에 이어 제2대 후원회장을 맡고 있다.

 

▲  무안과 제주 (주) 삼영산업, (주) 삼영스톤, 성암문화재단 창립자 고춘석 회장 

 

 그는 무안에서 태어나 5살 무렵 함평으로 이사했다. 아버지께서는 함평에서 정미소 2곳을 개업했으니 따지고 보면 사업면에서 스승이기도 했다. 덕분에 고춘석 회장은 함평에서 초,,고를 졸업하게 되었고 유년 시절의 추억은 함평에 고스란히 깃들어져 있다.

 

 성암문화재단의 설립자이자 이사장이기도 한 고회장은 마음 아픈 개인사를 드러내며 죽은 친구를 기리자.”는 다짐에서 발전시켜 후배들을 돕는 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첫 신호탄으로써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선행 시작의 기저에는 친구의 희생을 마주함으로 뼈가 시린 슬픔이 동반된 트라우마를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겠다는 결의가 우선돼야 했다. 함평읍 소재의 함평초등학교 동산에 탑을 만나게 되는데 이 탑 돌에 새겨진 글은 우정의 등불이다.

 

 “1966527일 물에 빠진 동무를 구하고 숨져간 귀한 벗의 거룩한 넋은 여기 가득히 넘쳐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으리.”

 

 ‘우정의 등불이라는 탑을 세운 계기이자 이 안타까운 우정의 이야기는 슬프게도 사회적 지위의 고회장을 확립한 데에 있어 여린 청춘 고춘석의 개인적 서사에 내밀한 중심 플롯이 되고야 만다.

 

▲ 함평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우정의 등불' 석탑  

  

 친구랑 놀기 좋아하는 발랄한 선도부장 12, 초등학생 5학년 고춘석이 등장한다. 당시에는 학교별로 대운동회가 열렸는데 보통 학급별, 마을()별로 경쟁하여 읍내 전체가 들뜬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학생들에게는 추억이 대단히 많은 축제라고 불릴만하다.

 

 당시에는 통학 거리가 멀었다. 주목 받는 선수들은 2km 이내 거리를 거뜬히 뛰어서 오는 아이들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학교와 가까운 읍에 사는 친구들은 달리기 실력이 다소 부족했다. 승산이 없던 읍에 사는 고춘석 선도부장은 문득 종남이가 생각났다. 달리기 선수로 먼 거리를 통학했던 종남이가 적격이었다. 종남이는 읍장의 아들이기에 읍에 오래전부터 살지 않았더라도 춘석이 동네 선수로 뛸 수 있는 명분이 있었다.

 

 예상대로 종남이는 1등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렇게 큰 기쁨을 안겨 준 친구 이종남이라는 패를 쥐게 된 건 분명 운명이었다. 그야말로 학생에게 유독 컸던 운동회는 춘석이라는 개인에게 점 하나가 붙게 되면서 이종남은 클태같은 존귀한 의미를 주게 된다.

 

 리별 달리기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종남이와 춘석이 친구들 열댓명은 함평천 대강포로 목욕을 하러 간다. 대강포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박*수가 훌러덩 옷을 벗고 물에 뛰어 들었다. 대강포 수문 옆은 물이 도는 곳이라 물 속에 뛰어든 박*수는 허우적거렸다. 이종남은 망설임없이 친구를 구하러 물 속에 뛰어 들어갔다. 위험에 빠진 친구는 구하는 데 성공했지만 대신 이종남은 회오리 물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던 12살 춘석이는 상심하며 평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한없이 좋은 친구인 종남을 잃었지만 그를 잊지 않고 애도하기 위해서라도 꼭 커서 성공하게 되면 장학재단을 세워 친구의 죽음을 헛되지 않도록 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결국 이를 실현시켰다.

 

군대 육군정보처에서 군납 업무를 한 경험으로 세림특수유리라는 회사를 설립하게 되면서 젊은 나이에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1983년 드디어 자신과의 약속을 잊지 않고 기금 4천만원으로 '우정의 등불'이라는 장학재단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우정의 등불 장학재단은 문을 닫고 말았다. 그 후 완전한 장학재단의 모습을 갖춘 건, 2010년 성암문화재단이 탄생하고서부터다.

 

 현재는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 친환경 석재가공 공장을 경영하는 고춘석 회장이 되었지만 과정은 단지 지난했다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많은 어려움을 헤쳐 왔다. 사기로 인한 부도, 몇 번의 좌절은 인간에게 당한 배신과 연관되어 있었음에도 그는 결코 인간을 증오하지 않았다. 수많은 인터뷰를 한 그이지만 번복하지 않은 중심 생각은 항상 같았다. 바로 인연의 소중함이다. 비록 사업의 장애물은 사람으로 인한 상처에서 기인 됐을지 몰라도 역설적으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날 수 있던 것도 주위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생성된 인적 네트워크 덕분이었다.

 

 제주에서 우연히 만난 중국인 가운데 한 사람이 마침 중국에서 돌 공장을 하는 사람의 조카였고, 공산당 서기장의 조카도 있어 사업 확장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워줬다. 오랫동안 형제같이 지낸 동향 노경수씨 역시 무려 5억원이나 넘는 거액의 사업자급을 마련해주는 배포를 보여주며 고회장이 무안 청계면에 있는 석재가공공장을 운영할 수 있게 한 은인이다.

 

 태산을 넘으면 평지를 본다. 그의 인생에 이토록 딱 맞는 속담은 없을 것이다. 어려운 일이나 고된 일을 겪은 뒤에는 반드시 즐겁고 좋은 일이 생긴다는 말이다. 됨됨이와 섬세한 감각이 발현되는 인간적 신뢰가 바탕이 되어 번번한 실패 속에서도 이겨내리라는 용기와 희망을 놓지 않을 수 있었고 이는 사업 운영 능력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1984년부터 약 4년간 함평 우정의 등불 장학회에 당시 돈으로 4,000만 원을 기증하면서 본인 스스로 생각할 때, 사업 수완을 발휘한다고 느끼는 지점에서 주저하지 않고 선행의 길을 개척했다. 관내 불우시설,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보일러 등유 지원을 비롯 선행의 규모를 점차 확장해갔다. 불우학생과 사회적 약자인 장애계를 위해 헌신하고자 전남 도내의 생계가 어려운 장애인 및 노인, 저소득 세대, 불우이웃 등 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돌봄이웃복지사업비 일환의 기금을 전달해 왔다. 12년 넘게 성암문화재단을 운영하며 25천만 원이 훌쩍 넘는 장학금을 지급해 오는 선행의 역사가 매우 탄탄하여 감히 그가 단련해온 석재 공장의 수많은 돌처럼 변함없이 신중한 고아한 인품을 보여줬다고 말하고 싶다.

 

▲ 고춘석 회장은 어린 시절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깊은 사색을 한 끝에 "한아름의 희망과 포부로 이 시간을 지낸다. 인내, 성실, 믿음, 사랑. 내일을 위한 추억과 갈망이 오늘의 현실을 말한다. 나는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며 오늘."이라는 자기에게 늘 주문처럼 말하는 암시와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불우장애인 가정에 5년 동안 현물 기증, 무안군 관내 체육시설 4억 상당의 조형물 설치, 농아아동 수술비 지원 등 이웃사랑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역 학생들에게 3천여만 원의 장학금을 매년 지급해 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전남장애계와 다문화 가정 등을 위해 사랑의 열매에 총 1억 원이라는 거액의 후원금을 전남장애인총연합회에 지정기탁했다36명의 한부모 가정과 조손가정 등 불우학생에게 2천여만원 장학금이 지급됐는데 군청과 다문화가정협회 등의 추천을 받아 엄격한 선발을 통해 선정했다.

 

 고회장은 마일리지처럼 누적된 기부금 덕분에 전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가입된 영광을 얻으며 전남 129(무안군2)로 고액 기부자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2021년에는 정부와 전남도가 그의 사회적 공적을 기리며 4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전남도지사 표창과 보건복지부장관상을 각각 수여했다. 그의 끊임없는 후원의 행렬에 수많은 사람이 행복과 희망을 봤다고 생각하니 고춘석 회장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마땅히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제약을 얻고 세상에서 자신감이 결여된 상태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를 애처롭게 했고, 이를 최대한 막아주고픈 아버지의 순박한 마음이었다.

 

 그가 경제적 능력이 되는 한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는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후원을 더 확대하여 미래의 꿈나무들이라면 누구나 지원받을 수 있도록 그가 펼쳐온 돌같은 단단한 이력에 협곡 같은 깊이를 더해 볼 계획이다. 그의 미래 기부 자산은 여전히 선량하게 축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