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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 기부는 지역의 미래 위한 투자… 초심 잃지 않고 고향 위해 힘쓰겠다”:함평방송

“장학 기부는 지역의 미래 위한 투자… 초심 잃지 않고 고향 위해 힘쓰겠다”

이흥재_동건종합건설(주) 대표

2022-12-22     조영인 기자

 

▲ 해보면 오두마을 모자심(母子心’)에서 만난 이흥재 동건종합건설 대표    

 

함평방송 창사 1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다소 기념적인 제1회 함평방송상 시상식이 열렸다. 그 중 애향상 수여자는 함평을 떠나서도 고향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않고 장학사업을 위해 힘을 보태고 있는 동건종합건설() 이흥재 대표였다. 그는 함평출향인 출신으로 고향 후배들을 위한 귀흥장학재단을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인재양성기금을 함평군에 기탁하며 남모르게 선행을 하여 출향인으로서 귀감이 되었다.

 

최근 11월에도 함평군 관내에 인재양성기금 1000만원을 기탁했다. 이 대표는 지난해 전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찾아 함평군 돌봄이웃 복지사업비로 5년간 1억원 기부를 약정하면서 개인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에 들게 됐는데 이는 최초의 함평 1호 회원으로서 이름을 올렸다는 영광을 동반했다. 그는 약 10년 넘게 손불초 졸업생 전원에게 50만 원씩의 장학금을 주었고 보통 통장을 만들어서 증정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장학재단과 별도로 졸업식 당일 사비를 들여 기분 좋은 의미를 덧대어 1만 원짜리 여섯 개를 용돈 개념으로 주며 가족과 소중한 자리를 보내라는 덕담을 하기도 한다. 외에도 학교 측에서 학생들이 겪는 애로사항을 전할 때가 있는데 한 귀로 흘리지 않고 사비로 도와주거나 운동회나 특별한 행사가 있는 자리를 빌어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이대표에게 귀흥장학재단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먼저 우리나라에 많은 장학재단이 있지만 전국적으로 살펴봐도 초등학교 전용 장학재단이 없다. 그가 최초로 초등학교 장학재단을 설립한거나 다름없는데 이 재단의 이름은 아버지와 이대표 본인의 이름 한자씩을 따서 지극히 사적인 의미가 깃들여 있다.

목포 사범대를 다니셨지만 이른 나이에 함평양민학살로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의 못다한 꿈을 이루겠다는 열정에서 비롯됐다. 그도 사정으로 인해 초등학교만 졸업 후 사회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경제적 여유를 찾게 된 지금이 더욱 값지다. 그렇기에 본인과 비슷한 삶을 겪게 된 아이들이나, 당장은 힘들지 않아도 도래할 미래를 이겨내듯 살아가야 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모범으로서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초석을 다져주고 싶었기에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아깝지 않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장학재단의 전신은 다수 있지만 초등학교 장학재단은 전무한 터라 운영방식에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학교의 최종 결정권자라고 해도 무방한 교장 선생님, 학교가 운영되는 과정에서 결코 적지않은 영향을 행사하는 학생 교육위원회 등 연관된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변치 않을 확고함은 어떤 기준이라도 순위와 가난에 초점을 맞춘 한정된 지원만은 지양하겠다는 것이다. 졸업생을 기준으로 두고 모두에게 혜택을 나누기로 했다. 함평의 경우 함평읍과 8개 면으로 행정이 나눠 있는데 읍은 대체로 시가지 기능을 하니 두 개의 초등학교가 있다. 나머지 8개 면은 예외 없이 각 1개의 초등학교가 배치돼 있는데 손불면은 읍처럼 유일하게 초등학교가 두 곳이나 있다. 출산율 저하로 시골에 있는 초등학교 수는 점차 사라지는데 머지않아 손불면도 초등학교가 하나로 합쳐지는 날이 올 것이니, 통폐합이라는 대안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한 학교가 사라지면 본 자금은 다시 국가 운영비로 돌아갈 터다. 그는 국가 정책에 의해 출산율과 시골 학교 문제가 1%라도 나아질 거라는 낙관을 그리며 최대한 보류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는 미래에 대한 걱정은 잠시 미뤄두고 그저 장학재단 설립 이래 주기적으로 지원하는 손불초 학생들뿐만 아니라 함평군 지자체에 장학금을 꾸준히 지원할 예정이다.

손불면 출신, 애향인. 본업은 여전히 대전 등지에서 주거용 건물 건설을 전문으로 하는 엄연한 주식회사 대표이다. 일과 별개로 늘 지역 사회에 대한 관심을 저버리지 않고 기꺼이 협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대표는 함평에서 결혼하였고 20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 그렇지만 아이들 교육과 또 다른 길에 대한 고민 후 마흔이 넘은 나이에 인생 제2의 도약을 꿈꾸며 대전으로 올라갔다. 아직도 본인을 소개할 때 그저 주택 사업하는 사람이라 칭하며 겸손하게 대답한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사업이지만 건설사의 대표로서 회사를 존속하기 위해서 남모른 고충도 많았다. 건설에는 전혀 무지한 상황이었기에 주경야독하듯 부족한 공부를 하고 현장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하면 안 됐다. 힘들게 살았고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며 얻은 값진 결과이다. 더구나 가진 것이 많아졌다고 남에게 베푸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 대표는 순탄한 삶을 살아왔다고는 할 수 없다. 인터뷰를 진행한 터는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던 집이다. 아버지를 6.25 양민학살 희생자로 일찍 여윈 어머니는 7살 때까지만 같이 살고 재가로 떠나셨다. 어린아이를 버리고 갔다는 식으로 어머니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는 분들의 이야기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린 아들을 두고 떠난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그가 성인이 되고 결혼하여 자식들을 키워보니 진실로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환갑 후 가족들을 모아 중대 발표를 하기로 한다. 오랜 시절을 떨어져 산 어머니를 모실 것을 공표했다. 아버지가 피를 흘리며 희생했던 용천사 흐린 골짜기에 집을 지어 어머니를 모셔왔다. 효심이 잔뜩 담긴 이 집의 이름은 직관적인 뜻대로 아들이 엄마 마음을 이해한다는 의미다. 어머니를 미워한 적 없고 완전히 이해했기에 함께 지낸 5년 반 동안에도 후회 없이 효도했고 돌아가신 현재 미련이 없다.

 

▲ 해보면 대각리 오두마을 이흥재 대표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지은 집. 모자심 현판이 먼저 반긴다.    

 

할머니의 손에 자라며 들었던 조실부모라는 주위의 수군거림, 어릴 때는 가장 운이 없는 사람처럼 지켜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건설업을 시작한 후 내가 이렇게 복이 많은 놈이구나라고 여겨졌다. 사업의 결실은 반드시 개인의 노력과 시간에 비례하여 오지 않는다. 그가 열심히 노력한 것과 동시에 주위에서 보낸 많은 도움과 운이 합쳐졌기에 안정적인 사업 수완을 구축할 수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에서 많은 생활도 했다. 평신도를 선택했지만 헌금만은 아끼지 않고 전부 무명으로 했다. 그때는 이름을 밝히고 기부를 하는 것을 거만함이 비치는 자랑으로 보일까 염려했다. 본격적으로 장학사업을 결정하면서 교육과정에 있는 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혹시나 비슷한 결정을 유보하고 있는 제 3자가 있다면 좋은 선례를 보여주면 선량한 마음이 전파되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림이 그려졌다.

 

우리나라는 외국에 비하면 기부, 사회 환원 문화가 미미하기도 하고 기부를 고액으로 한정하여 부담감에 압도되어 시도 자체를 안 하려 한다. 그는 기부를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본인과 전혀 관련이 없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미는 것부터 시작해보라고 조언한다.

 

요즘 사회는 절대적 빈곤보다는 상대적 빈곤이 더 큰 문제 같아요. 함평만 봐도 옛날에 비하면 충분히 잘살고 있죠. 이런 시대에도 물리적, 정신적 허기를 느끼는 분들을 위해 도움주고 싶어요. 제가 어렵게 살 때 누군가는 도움을 줬어요. 저는 더 많은 분들이 단돈 만 원이라도 적은 금액이라고 멈칫하지 않고 남을 위해 기부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많은 분이 자긍심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연신 하는 것 없다고 생각하는 제게 이 상은 과분하지만, 앞으로도 함평을 향한 변치 않은 애향심을 지켜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히 받겠다.”고 말하며 주위에서 축하를 받고 무엇보다 늘 선택에 이견 없이 항상 따라준 아내의 자랑스러운 박수를 받는 것도 큰 보람이었다고 전했다. 앞으로도 이 변치 않은 마음으로 고향을 위해서 힘쓰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