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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을 넘어 전국적인 농민운동으로 자리매김한 게 큰 보람”:함평방송

“함평을 넘어 전국적인 농민운동으로 자리매김한 게 큰 보람”

서경원_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기념사업회 회장

2022-12-22     조영인 기자

 

▲ 대동면 자택에서 만난 서경원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기념사업회 회장    

 

함평이 깨어났다, 이제야 함평 고구마 투쟁의 가치를 알아주게 됐다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잊지 않고 버텨온 시간이다.”

 

함평방송 창립 1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제1회 함평방송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기념사업회의 핵심 인물을 만났다. 서경원 회장은 상장에도 언급됐듯이 1976년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내놓은 단식투쟁까지 전개하여 대한민국 농민운동사와 민주화운동의 초석을 만들어 변화와 혁신을 이루었다. 이 상 하나로 그간 직면해온 편견과 무지, 인지되지 않은 상황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역사적 과정의 힘듦이 상쇄되지 않겠지만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이 대표 농민운동으로서 인지되는 안전 궤도에 들어간 듯한 희망을 봤다.

 

서경원 회장은 기쁜 마음에 그를 만나러 온 사람들에게 상을 꺼내 보여준다. 그것은 개인 한 명의 노고로 인해 받은 보상이 아닌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함평의 혼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하는 의식적 행동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소위 거들먹거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일궈온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기념사업회라는 단체를 향해 응원과 박수가 모였으면 하는 바람이기도 하다.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이 일어난 지 어언 50년을 향해 달려가는 시점에도 늘 투쟁하듯 살았던 이유는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고구마 투쟁사에 대해 언급하면 무지한 사람도 많고 안 좋은 시선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세력의 잔존도 한몫했다. 희망을 잃지 않고 단식으로 목숨을 바치는 것조차 고민하지 않은 농민들이 이룩한 승리는 외로운 싸움에 포기하지 않은 결과 가능했다. 후에는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기념사업회의 단체가 결성되어 엄청난 노력을 했기에 조금씩 농민운동의 가치가 재점화되어 빛을 보기 시작할 수 있던 것이다.

 

전설적인 인물인 함석헌 선생과 문익환 목사님 모두가 뱉은 핵심적인 가르침이자 우리 고구마 투쟁의 변하지 않은 가치는 '농민이 스스로 말할 줄 알고 자기가 누군지를 알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점이다. 함평지역을 넘어 전라남도에서 대표적인 농민항쟁으로 평가받는 순간이 올수록 그가 겪은 투쟁의 일거수일투족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도 하나의 방증이다. 당시 주도자로서 고구마 피해보상 투쟁에 큰 의미를 새길 수 있는 일화를 말씀해 주셨다. 당시에 마을 주민이자 회원 중 한 분이 질문했다.

 

형님, 이름 하나 쓸 줄 모르는 나한테 뭔 큰일을 할 수 있겠다고 이런 일을 도모해 주십니까?

 

내일 아침이면 구두를 빤딱하게 닦고 머리를 짧게 깎은 기름칠하게 생긴 사람이 올 것이니, 와서 이 투쟁에 대해 몇 명이 가냐, 뭘 준비했냐 깐깐하게 물으면서 수첩에 적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와도 쫄지 말고 너는 이름은 쓸 줄 모르니까 누가 버린 볼펜이라도 갖고 와서 담뱃갑에 긁적긁적 쓰는 시늉이라도 해라. 이유를 묻거든, 그러는 당신은 왜 쓰냐고 반문하면서 저는 로마 교황청에 보고를 해야 한다고 말해라, 그러면 그들은 죽기 살기로 도망갈 것이니 지켜봐라.

 

그 다음날이 되니 성님 말이 꼭 들어 맞았습니다.” 하고 전했다는 이야기이다.

 

서경원 회장의 이야기 속내는 함평고구마항쟁 전까지는 농민은 늘 관의 명령대로 곧이곧대로 해왔다면 항쟁을 통해서야 드디어 농민 스스로가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라는 의의가 있다.

 

함평고구마 투쟁은 그야말로 농민이 주인이었다. 사람이 생존에 필수적인 곡식과 채소를 생산하는 주체들이 이 땅에서 천대를 받고 있었다는 것. 다행히도 먼저 깨우친 분들이 동참을 해줘서 함께 싸울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썩은 고구마가 살아났다는 평을 받게 될 수 있었다.”

 

▲ 임재상 수석부회장과 서경원 회장    

힘에 부친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투쟁에 참여할 인원을 동원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 사람이 너무 적으면 항쟁이 초라해 보이고 전쟁터에 나가게 된들 그 전부터 이길 수가 없겠구나, 절망을 품게 되고 지리멸렬한 감정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오겠다고 약속한 사람마저도 길이 막히고 차에서 내리라고 강요를 당하곤 했는데 이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전국에서 농민들이 모였고 100여 명 가까이가 되는 수치였으니 돌이켜 보면 큰 성과이다.

 

이렇게 어렵게 투쟁에 참여한 농민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단식을 9일 동안 유지하면서 주장을 피력하는 데 굴하지 않고 지켜냈다. 그는 단식을 하면서 잠 한숨을 못 잤다. 긴장도 되지만 경찰들이 마이크로 목숨을 빌미로 협박의 말을 뱉었다. 긴장이 이완될 틈 없이 두려움에 잠식되는 상황의 연속에도 그는 외쳤다. “하늘을 믿고 하느님의 백성임에도 이토록 천대받는 농민이 됐지만 우리는 변치 않은 하늘 아래 백성이기에 너희들이 죽인다고 쉽게 죽을 사람도 아니다.”며 결의를 표현했다.

 

오히려 위협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고 때로는 폭력으로 맞서기도 했다. 그런 성격 때문에 항상 천주교에서 두 가지 평이 따라왔다. 한쪽에서는 폭력을 말리고, 또 한 편에서는 잘했다, 속 시원하다는 의견이 동행했다. 긴 항쟁 동안 외력에도 굴복하는 법 모르는 그의 거친 성격을 아는 사람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대놓고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밥 먹듯이 했던 사람들도 결론적으로 그를 건들지는 않았다. 추측해보자면, 서경원 농민회장을 건들게 되면 천주교가 반발할 수 있고 종교가 개입하면 정권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이라는 예측 되니 이를 지우기에는 리스크가 컸을 거라는 그의 짐작이다.

 

폭풍 속에도 언제나 찾아온 보람은 단 하나였다. 이기겠다는 기대감 하나 없이도 눈앞의 부당함에 쫄지 않고 맞선 결과 승리를 쟁취했으니 말이다. 당시 도지사, 중앙정보부장까지 회담에 왔지만 기꺼이 중단시켜 버렸다. 결과적으로 보면 300만 원의 보상을 받았지만 이상한 흥정을 하는 것이다. 424일 백만 원, 5월 말까지 추가 지급을 고려하겠다는 말을 단칼에 거절했다. 시장에 와서 돼지 흥정하듯 일을 가볍게 생각하는 기득권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으면 안됐다. 더구나 어떤 희생과 용기가 결집 된 지 잘 아는 그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단초가 되어 더 큰 용기와 확신이 모이는 유예 시간으로서는 충분했다. 농민의 단결이 주는 교훈은 절망으로 느껴져도 일말의 의심을 거두면서 앞서 나아갔다는 점에 있다. 항쟁의 한 가운데에서 선 농민들은 재고 따지지 않고 달렸다고는 하나 절망이 기저에 깔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승리를 거머쥐게 되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고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당연함을 품고 사는 지금과 달리 농민들은 늘 우리가 관을 상대로 어떻게 이기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 때였기에 기쁨은 배가 됐다.

 

해방 이후, 그것도 이 작은 함평에서 농민들이 자기주장을 직접 말한 것이 처음인데 승리를 이끌었으니, 함평 고구마 항쟁은 무시할 수 없는 파급력을 지닌 농민항쟁이었다는 것을 부인하면 안 된다.

 

내 남은 세월에도 이토록 큰 싸움을 길게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우리 농민들이 나서서 움직였다는 것을 자긍심으로 여기고 역사 속에서 한 줌의 재처럼 사라지지 않고 늘 타오를 수 있는 심지로 남아 의미가 계속 회자되기길 바란다.”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이야 이제는 고생했다. 그때 참석을 못 해 미안했다.’는 말을 전하지만 솔직히 여전히 함평에 고구마항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조차 모르는 군민들도 많다. 항쟁 당시에도 그 어떤 국내 신문사에서도 이 일은 언급해주지 않았는데 외국 신문에서 이 사건을 대서특필로 다루었고 그 기사의 원문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런 아쉬움을 함평 방송에서 나서서 협조해주니 울컥한다.

 

최근에는 전남대학교 사회학과 윤수종 교수가 정확한 연구를 통해 방대한 양인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사의 역사를 정리해줬다. 이를 기점으로 학문적으로 연구, 발전해줄 수 있는 인물이 등장했음 한다. 45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서야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이 수면 위로 떠오른 만큼 지난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늦었다고 불평하기보다 한발 성장해 이제는 함평을 넘어 전국적인 역사적인 농민운동으로써 확실히 자리를 맺게 되는 가치로 깊게 안착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