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후'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함평의 자랑스런 독립운동가다. 학교면 복천리 장동마을 출신의 노근후 선생, 그가 살아생전 지은 집에는 장남 노강남 씨 부부가 살고 있다. 함평방송에서는 2월, 3월 장동 마을을 찾아가 아버지 노근후를 그리워 하시며 말씀하시는 게 마치 '사부곡'처럼 들리는 노강남 씨 얘기를 들었다.
독립운동가 노근후 생가는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다. 대문 가까이 가면 ‘독립유공자의 집’이라는 명패도 걸려 있다.
노강남 씨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기 전에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교직생활을 하셔서 저는 아버지 따라서 학교를 자주 옮겨다녔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은 학다리 중앙초등학교로 했다가, 철성교, 북교를 다녔습니다.그러다가 6학년 1학기 때 함평초등학교로 가서 졸업은 함평초등학교에서 했습니다. 중학교는 함평중학교로 입학을 했다가 학다리중학교에서 졸업을 했습니다. 고등학교는 학다리 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젊어서 노동청에서 근무를 하다가 직장 생활 마지막은 학다리고등학교 서무과에서 퇴직했습니다. 저는 39년생인데 실제로는 38년생 범띠입니다. 지금 나이가 여든 넷입니다.
아버지 노근후 선생님께서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시고, 1993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으셨는데 아버지께서 독립운동 하셨던 얘기를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우리 아버지께서는 어릴 때 총명하셨는가 봅니다. 그 때 당시 아버지 넷째 숙부께서 다시공립보통학교 훈도로 계셨는데 조카가 영리하니까 데리고 가 공부를 시켰다고 들었습니다. 다시공립보통학교에 가서 우리 아버지께서 자기 또래보다 공부를 잘 하니까 월반을 시켰다고 해요. 월반을 해서도 "쭉 1등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아버지는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과 관련되어 일본 놈들에게 잡혀가 7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이 일로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핫병이 생겨 56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려고 하자 손가락 열 개를 찢어 할아버지 입에 피를 넣어 소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맞아요. 우리 아버지께서는 효심도 대단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지극정성으로 소생하셔서 3일간을 더 사셨습니다.
노근후 선생님은 민족독립을 위한 인재양성을 위해 교사의 길을 걷게 되는데 아버지께서 거쳐간 학교가 여러 곳이지요?
아버지께서는 1929년 맨처음 해남공립마산 보통학교로 발령을 받아 해남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후배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우리 말 노래를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잡혀 가 옥고를 치루게 됩니다. 학교에서도 해직되었습니다. 그 후 7년 동안 보호 관찰대상이 되어 일제 감시를 받는데, 이 기간 아버지는 함평 고향에서 야학을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갖도록 교육하였습니다.
1938년 진도 공립석교소학교로 복직 되었다가 학다리 동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함평북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다 1949년 목포고등학교 교사 1951년에는 함평농업고등학교 교사, 1953년에는 학다리중앙국민학교를 거쳐 1960년 함평서국민학교, 1971년 함평동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73년에 퇴임하셨습니다.
노근후 선생님의 송덕비가 선생님 마지막 근무지였던 함평동초등학교 정문 앞에 세워져 있는 걸 보았습니다. 1971년 5월 '스승의 날'에 국민훈장 동백장. 1993년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하여 대통령 표창을 받으셨고, 2003년에 국립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 되셨다고 기록도 읽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당시 많은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 ‘한글의 노래’라고 가사를 쓴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번 읽어주시겠습니까?
그 시절만해도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게 이런 무지 때문이라 아버지는 생각하시고 말씀하신 대로 ‘한글의 노래’를 지었습니다. 노래 가사는 이렇습니다.
이십세기 밝은 세상에 태어났거만 글 모르는 나에게는 어두운 나라 눈 뜨고 안 보이는 설움이 있고 목 메여 울지 못할 눈물이 있소
배웁시다 세종대왕 남기신 한글 읽읍시다 기역 니은 늦었다 말고 내 눈에 가린 티끌 내 손에 닦아 광명한 새 세상을 다시 봅시다
우리 함평에 독립유공자 노근후 선생님을 많은 분들이 모르신 것 같아 함평방송에서는 이번 3.1절을 맞아 특집 기사도 싣고 <함평 사람들>봄호 잡지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끝으로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워낙 아버지께서 겸손하신 분이라 당신 이름을 알리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보니 ‘독립유공자 노근후’라는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우리 아버지께서 살아 온 삶이 참 훌륭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나 그리고 내 가족만을 생각하지 않고 내 고향, 내 조국을 늘 생각하시면서 사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아버지께서 남기신 이 집이며 살아생전에 아버지께서 심고 가꾼 마당에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소중하게 보입니다.
가끔 우리 자식들이 말합니다. “아버지, 살기 좋은 아파트로 이사 가 사세요.” 그럴 때마다 저와 아내는 할아버지, 할머니 손때가 묻어 있는 이 집을 지키며 살겠다고 말하곤 합니다. 아버지께서 심어 놓은 나무도 다듬고, 아내와 텃밭을 일구며 사는 지금의 삶이 행복합니다. <저작권자 ⓒ 함평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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