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습니다"...임진란에 12척의 배를 수리한 함평 출신의 장군

-한 집안에 2대에 걸친 3분의 충신...함평 해보에 정충량, 정득량, 정대명 장군

최창호 대표기자 | 입력 : 2024/05/15 [19:51]

 

▲ 해보면 금계리 월현마을에 위치한 '지산사' 유적지, 서원철폐령이 내리기 이전에는 이곳에 정충량, 정득량, 정대명 장군을 배향하는 서원이 있었다. '지산사' 유적지 앞에서 후손인 정영섭 문중 부회장이 서 있다.   

  

1597716일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해협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대패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전사하였고, 수군 2만여명, 거북선 3, 판옥선 140여척이 침몰되었다.

 

이러한 참패의 원인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계략에 선조가 넘어갔기 때문이다. 원균은 장계에 나 같으면 가토를 잡을 수 있었는데 이순신은 밍기적 거리다가 놓쳤다라고 보고를 하였고, 선조는 이순신이 나를 능멸했다고 크게 화를 내며 파직을 명하였다.

 

이순신이 없는 우리의 바다는 바람 앞에 등잔불이었다. 다시 이순신을 전장으로 내보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순신은 백의종군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지금 신에게는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장계를 써서 임금에게 보낸다.

 

여기서 12척의 전선은 당시 전투에 투입하면 쓸만한 전선이었을까? 아니었다. 구멍나고 깨지고 부서진 전선으로 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전함이었다.

 

우수영국민관광지에 가면 ‘폐선을 명량의 전함으로 라는 제목의 조각상 해설문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 우수영국민관광지에 세워져 있는 '폐선을 명량의 전함으로' 조각상    

  

칠천량 패전 이후 우리에게 남은 전선은 부서진 판옥선 아홉척 뿐이었고 엄청난 왜군 함대는 전라도 해역에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온전한 전선이 없어 해전이 불가능 했던 이 때 밤낮으로 폐선을 수리하여 마침내 명량해전을 가능케 한 사람들이 있었다. 정충량, 김세호 등과 함께 전쟁준비에 혼신의 힘을 쏟은 이들이 바로 저 무명의 선장과 목수들이었다.”

 

해보면에는 명량대첩의 숨은 주인공 12척의 전선을 수리한 정충량 장군의 후손인 진주정씨 보공공파종친회 정영섭 부회장이 살고 있다. 4월 어느 날 지산사 유적지 앞에서 그를 만났다.

 

“2008년도인가 9년도인가 그때 당시에도 제가 호남종친회 부회장을 했습니다. 종친회의가 끝나고 점심식사를 하는데 호상공파 조카 뻘 되는 분이 제 옆으로 와서 아이, 아저씨 이런 좋은 일이 있는지 몰랐습니다그러는 거예요. “뭔 일이요?”그러니 광주일보에 이렇게 신문에 나 있습디다그래요. 내용은 제 윗대조 정충량장군이 폐선을 수리하여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얘기였어요.

 

그 말을 들으니까 상당히 흐뭇하대요. 지금 우리 종친 고문으로 계시는 정동주 씨가 그 때 부군수로 계셨거든요. 그 분하고 나하고 우리 마을에서 두 분이 계세요. 점심을 먹은 다음에 광주일보 본사가 어딘가 물어물어 간 것이 신역 앞에 2층에 가 있더만요. 가서 “4월 며칠날 신문을 보자. 우리 할아버지 기록이 되어 있으니하니까 신문을 보여줘요. 신문 1면에 손바닥만 허게 써져 있대요. 그래서 그 후로 부랴부랴 정동주 씨랑 문중 어르신들과 의논을 해서 도청도 몇 번 가고 했습니다.

 

그후 진도군에서 무명용사들 제를 지낸다고 해요. 초청을 받아서 제가 갔습니다. 그때는 진도 문화원에서 제를 지냈고, 한 2년전부터는 진도 향교에서 합디다. 그때는 사당이 없어서 채알만 치고 진도군수가 초헌관, 군의장이 아헌관, 제가 종헌관으로 해서 예를 올렸습니다. 나중에 제를 지낼 수 있는 사당을 짓는다고 해서 저도 성금을 내고 우리 회장님도 종친들도 다 성의 표시를 했습니다. 특히 우리 회장님이 공직에 있으시면서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쓰셨습니다.지금 이 사당에 정충량 할아버지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 정득량 장군의 묘소는 해보면 연동골에 자리해 있다.  정득량 장군의 묘소 앞에서 진주정씨 보공공파종친회  정영섭 부회장이 묘지 조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해보에 정엽섭 씨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숨은 장수 정충량 장군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을 비교적 담담히 얘기하였다.

 

함평 사람들 대부분 '정충량 장군'을 모른다. 문중에서도 세세한 사실을 몰랐듯이 그가 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의 판옥선을 정비한 장군이었다는 역사적인 사실 또한 모른다. 정영섭 씨는 정충량 장군의 묘지가 신광면 좌야 마을 못가서 도로변 산에 위치한다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만난 지산사 유적지는 "정충량 장군의 사촌동생인 정득량 장군과 정충량 장군의 아들 정대명 장군을 배향하는 곳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기 이전에는 이 곳 지산사에서 세 분을 배향하였다"라고 정영섭 씨는 설명하였다.

 

한 가문에 2대에 걸쳐 3명의 충신이 나왔다는 것은 문중의 자랑이기도 하지만 함평사람으로서 자긍심을 갖을만 하다.

 

유림과 후손들이 1963년 지산사 옛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충신 세 분을 이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호남의 거유 송재성 공께서는 비문에 이렇게 글을 남겼다.

 

삼충께서 타계하신 지가 사백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충효와 절의가 하늘에 해와 별과 같이 빛이 나니 눈이 있는자는 볼것이며, 입이 있는 자는 이곳이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 있었음을 모두 말을 할 것이다. 그러한즉 이곳에 큰 비석을 세운들 또한 어찌 삼충의 빛나는 이름과 함께 하리요마는 이 일로 인하여 천년 백년이 지난 후에라도 이곳에 지산사가 있었음을 확연하게 알게 될 것이다라고 썼다.

 

지산사 유적지에서 가까운 곳에 정득량, 정대명 장군의 묘소가 있다기에 그곳에 들러 보기로 하였다. 삼충신의 록봉으로 받은 유산중 임야 일부를 매각하여 거액의 종중자산이 확보되자 허투루 쓰지 않고, 문중에서 지산사유허비각 정비와 묘소정비를 제대로 하여서인지 관리가 잘 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신광에 있는 정충량 묘지도 마찬가지로 문중 사람들의 정성이 느껴졌다.

 

아쉬운 건 정충량, 정득량 장군, 정충량 장군의 아들인 정대명 장군의 기록이 온,오프라인에 잘 드러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동명이인의 인물은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는데도 특히, 정충량, 정득량 장군은 기술되어 있는 자료 찾기가 힘들거나 빈약하였다.

 

그날 나는 신광에 있는 정충량 장군 묘소까지 둘러보고 돌아와 며칠 동안 틈나는 대로 함평 해보에 3분의 충신의 자료를 찾아 정리해 보았다. 더 깊이 있게 연구하여 세 분의 충신의 자료를 보강하길 바랄 뿐이다.

 

정충량 장군은 호는 송계이고, 본관은 진주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담대하고 지략이 있었다. 임진란에 사촌동생 득량과 함께 도원수 김명원을 찾아가니 기특하게 여겨 이억기의 막하로 배속 시켰다.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원균이 칠전량 전투에서 대패하자 유진장이 되어 진중을 안정시키고 부서진 폐선을 단기간에 수선하여 명량해전에서 왜선을 격파하고 대첩을 거두는 데 이바지 하였다. 노량해전에서 다리에 탄환을 맞았으나 의연히 끝까지 싸웠다. 난이 끝나고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연로하신 아버지가 생존해 계셨으므로 사양하였다. 묘소는 함평군 신광면 삼덕리 좌야에 있다.

   

정득량 장군의 호는 죽포이다사촌형인 정충량과 임진년에 의롭게 일어나 한산해전, 안골포해전에서 무수히 많은 적을 사살하던중 손을 다처 상처가 심했다. 1598920일 예교지역 해전에서 탄환을 맞았으나 상처부위를 동여매고 적을 무찔렀다. 임잔왜란의 마지막 대첩이었던 노량해전은 왜선 5백여척의 대함대와 하루 낮 이틀 밤을  싸운 격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정득량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장열하게 싸운다 전사 하였다.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고, 해보면 금계리 연동골에 묘지가 있다.

 

정대명 장군의 호는 지곡이다. 정충량장군의 장남으로 1584126일 출생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54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참전하였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광교산에 도착하여 1637(인조15) 15일부터 6일까지 벌어진 광교산전투에서 청나라 부마인 백양골라를 사로잡고 적장 3명을 사살하는 막강한 청군을 섬멸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130일 인조가 청에게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례(절을 한 번 할 때 마다 이마를 땅바닥에 세 번 부딪히는 것을 세 번 반복하는 행위) 청나라 태종에게 행하게 되자 대성통곡하며 고향으로 내려왔다. 전라병사 김준용 장군이 여러 차례 현직에 나올 것을 권하였으나 불응하였다. 1647326일 여생을 마쳤다. 묘소는 해보면 금계리 연동골에 있다

 

▲ 함평 향교 앞에 세워져 있는 ' 의향 함평' 비석에는 병자호란 때 범같이 용맹스런 장군 6명 중 한 분인 정대명 장군 이름이 비석 뒷면에 새겨져 있다. '육호장군 정대명'    

 

난이 끝난 후 후세 사람들은 김수만 호남의병대장, 정대명 별장, 김설 호남의병부장 겸 척후장, 김수권 호남의병참모장, 허익봉 호남의병선봉장, 범진후 호남의병군수장 6분을  범같이 용맹스런 장군이라는 뜻으로 '육호장군'이라 불렀다.

  

함평군 향교 앞 의향함평비석 뒷면에 '육호장군 정대명' 장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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